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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에 걸린 이야기.
38도. 송글송글 올라가는 빨간 수은은 며칠 째 38도라는 그 위치에서 내려갈 생각도, 올라갈 생각도 통 않았다. 업무에 지장이 가선 안 되니까, 딱히 돌봐주는 사람도 없이 알아서 물수건의 물을 짜고, 식으면 곧장 찬 물로 바꿔 오고, 혼자서 그러고 있자니 꽤 적적하긴 해도 창피하진 않은지라 꽤 버틸 만 했다. ‘에델슈타인의 유일한 의사가 감기에 걸렸다’ 라는 소식을 벨이 듣게 되면, 아마 곧장 난리를 치며 제 앞에서 이죽거리면서 웃을 게 분명할 테니. 오히려 이대로 어찌저찌 잘 버텨내는 게 더 좋은 것도 같았다.
의사가 우습게 감기에 걸려버린 이유는 실로 별 일 아니었다. 퇴근길에 부주의하게 소나기를 맞은 탓이다. 괜찮겠지, 하고 생각했던 비가 이렇게 감기가 되어 돌아올 줄은 누가 예상했겠는가. 소나기가 제법 독한 소나기였던 모양이다. 목이며, 코며, 시큰시큰 도는 것 같은 감기 기운에 어질거림을 느끼며, 지그문트는 그렇게 속으로 생각했다. 애당초 비를 맞는 게 아니었다. 훅 어질거리는 이마를 또 한 번 부여 잡으며, 속으로 매몰차게 비를 맞았던 며칠 전의 자신을 비난해 봤다. 그래도 열은 도저히 내려갈 생각을 않았다. 축 쳐져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도 제 말을 들을 생각을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잠시간 나른해진 듯한 느낌으로 몸에 힘을 쭉 빼고 있었다. 무겁게만 느껴지는 가운은 제멋대로 중력에 이끌어 땅에 살짝 끌렸다. 하얀 가운이 더러워지겠네. 빨래를 해야 할 텐데. 라는 부질없는 생각이 머리를 떠돌았다. 순간 또 다시 자신을 감싸는 듯한 기분나쁜 열기에, 지그문트는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감았다. 몸 안에서 마치 불타는 광석이라도 잘그락거리며 담겨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날씨는 요 근래 부쩍 서늘해져서, 진료실 안에도 간간히 싸늘한 공기가 용케 건물 틈을 비집고 들어와서 제 뺨을 팽팽하게 당길 정도였다.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뜨거워진 몸과 달리 손끝은 바짝바짝 얼어가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녀는 차갑게 질린 손끝을 초조한 손길로 매만졌다. 도저히 일을 할 상태도, 기분도 영 아니었다. 그래도 일을 하긴 해야 했지. 지그문트는 핑 도는 것만 같은 시선을 던져, 책상 위에 한가득 놓여져 있는 진료 차트와 보고서의 일군을 바라봤다. 일하기 싫다. 자신에게는 퍽 어울리지 않는 생각이 하얗게 질린 종이 위로 둥실거리며 떠다녔다. 만년필을 잡은 오른손에는 도저히 근로 의욕이라는 게 들질 않았다. 그 탓에 그녀는 거의 자포자기한 사람처럼 멍하니, 하얀 종이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종이 위에 무슨 글자가 간각되어 있는지는 이제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냥, 침대에 들어가고 싶었다.
업무를 어떻게 봤는지도 통 알지 못할 정도로 대강대강 일을 끝마치고는, 진료실의 불을 끄고 평소보다 30분 정도 일찍 퇴근했다. 에델슈타인의 밤은 추운 편이었다. 벌써 입김이 나는 것 같아, 그녀는 훌쩍거리면서 손을 이리저리 서로 부볐다. 집까지 돌아가는 길은 한없이 멀게 느껴졌다. 이따금씩 석양이 질 무렵의 바람이 자신의 가운을 아프게 팔락거리고는 허공으로 날아섰다. 내일은 이런 상태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라고 생각하면서 그녀가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갔다. 집으로 가는 길에 있는 모퉁이를 꺾을 즈음이었다.
지그문트?
그 말에, 그녀는 힘없는 시선을 치켜들어 목소리의 근원을 찾았다. 시선 끝에 멈춰선 사람은 꽤 오랜만에 마주친 제논이었다. 며칠간 베리타스에서 임무 수행을 하느라 에델슈타인엔 오지 못할 것 같다고 하더니, 이제야 임무가 다 끝난 모양이었다. 루티를 꼭 끌어안고 비밀 기지로 향하는 것같은 그를 바라본 지그문트가, 반갑다는 티도 내지 못한 채 겨우 힘을 내어 목소리를 냈다. 오랜만이네요. 제논은 인사를 받을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지그문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제논, 왜 그래?
지그문트에게서 발열 반응이 느껴져. 혹시 어디 아픈가요?
아니, 그게….
아프다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제논의 성격상, 감기라도 걸렸다고 하면 곧장 자신을 프로멧사에 태워 그의 정비를 도와주는 프로메테 교수 앞에 가져다 놓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그렇다 해서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 앞에서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것도 그녀로서는 차마 못할 짓이었다. 지그문트는 대답 대신 목도리로 자신의 입 부분을 살짝 가렸다. 그러나 대답할 시간조차 없이, 이마에 그의 손이 와닿는 것이 느껴졌다. 그의 손끝은 언제나 그렇듯이 차가웠다. 반면에 그의 손끝에 닿는 자신의 신열은 평소보다는 분명 뜨거운 상태일 테다.
열이 나는 것 같아요. 제 체온과 달라요.
지그문트가 감기에 걸렸다는 거야?
응. 틀림 없어. 평소와는 다른 체온이야. 지그문트, 이러지 말고 어서 수리받으러 가요.
아뇨. 괜찮아요. 금방 나을 거에요.
그녀는 손사레를 치면서 가까스로 그의 손을 떼어냈다.
저번에 지그문트가 그랬었잖아요. 감기는 그냥 내버려두면 더 덧난다고.
그건 말이에요. 무릎에 상처가 났을 때 하는 말이었어요. 감기는 그냥 내버려두면 나아요.
루티, 진짜야?
지그문트는 의사니까 제논보다 더 잘 알지 않을까?
제논은 루티의 말을 듣고도, 영 미심쩍은 듯이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지그문트를 힐끗 쳐다보고만 있었다. 이대로 자신을 보내기엔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었다. 제논은 제네로이드니까, 밤을 새면서까지 자신을 간호한다 해도 감기에 걸리지는 않겠지. 조금 몽롱해진 정신으로 무심히 그렇게 생각하던 지그문트가 순간 자신의 생각에 되려 흠칫, 거리며 살짝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밤을 새워서 간호라니, 대체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지그문트는 평소보다 조금 화끈 뜨거워진 뺨을 목도리 안에 푹 숨기며, 안절부절하는 눈빛으로 그의 애꿏은 팔에 시선을 던졌다. 눈을 마주친다면 가로등의 불빛 때문에 달아오른 제 얼굴이 보일까 두려웠던 탓이었다. 한참동안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니 제논이 몸을 살짝 돌리는 것이 눈에 보였다.
미안해요.
제논, 왜 사과하는 거에요?
밤이 늦었으니까요. 미안해요. 어서 집에 가서 쉬세요.
곧 그의 손은, 자신의 어깨를 모퉁이 쪽으로 부드럽게 틀어 주었다. 그 덕에 반쯤 타의로 등이 떠밀린 지그문트는 멍하니 고개를 틀어 제논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곧 제논이 평소와 같이, 덤덤한 목소리로 작별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가 들렸다. 잘 자요. 지그문트― 그 말을 남긴 채, 제논은 루티를 끌어안고는 자신이 원래 가려고 한 듯한 방향으로 걸음을 다시금 옮겼다. 저벅저벅거리는 발소리가 길거리에 가득 들어차다 못해 서서히 멀어질 즈음이 되어야, 지그문트는 멍하니 다시 걷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원래 걸으면서 주의를 집중하지 않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래도 두 눈에는 도저히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그 탓에 그녀는 거지반쯤 터덜거리며 집으로 가는 골목길을 걸어갔다.
매일 적어내려가는 일기도 오늘은 통 길게 쓸 기분이 아닌지라, 짤막하게 두세줄 정도로 끝내 버렸다. 잉크가 담긴 통에 코르크 마개를 끼워넣은 다음에야 그녀는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몸이 아프다보니 평소와 같은 침대도 여지없이 불편했다. 이불을 꼭 덮은 채, 그녀는, 내일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라는 생각을 중얼댔다. 그래도 병자는 병자인 모양인지라, 눕고 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한창 얕은 수면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였다.
똑똑, 무언가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얕은 잠을 자던 지그문트가 바짝 정신을 차렸다. 안경조차 쓰지 않은 맨눈으로 내다본 창문에는 어렴풋한 실루엣만이 드리워져 있을 따름이었다. 곧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창문 좀 열어 주세요. 지그문트. 그건 분명 익숙한 목소리였다. 지그문트는 안경을 쓸 생각조차 못하고 얼떨결에 창문의 잠금 장치를 풀어 내렸다. 곧 얼굴이 살짝 달아오른 채 창문을 발칵 여는 그의 모습이 보였다.
제논?
미안해요. 문은 잠겨 있길래. 하는 수 없이 창문으로 왔어요.
짧은 말만을 던진 뒤, 제논은 손에 들고 있던 무언가를 그녀에게 보여 주었다. 그건 자그마한 약 봉투에 들어가 있는 알약 두어 개였다. 이게 뭔가요, 라고 묻는 듯한 자신의 표정을 봤기 때문일까. 제논이 조금 상기된 얼굴로 대답했다. 약이에요. 약국들은 모두 닫았길래 베리타스에 가서 나타니엘에게 구해 왔어요. 지그문트는 어렴풋이 보이는 약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제논은 이걸 구하기 위해, 이 늦은 시간에 베리타스까지 다녀 온 것일까.
자고 있을까봐 창문을 열어서 책상에 살짝 두고 가려고 했는데, 창문이 잠겨 있었어요. 혹시 자고 있는 걸 깨운 건가요?
아뇨. 이제 막 누운 거에요.
지그문트는 거짓말을 중얼거렸다.
다행이에요. 나타니엘이 그러는 데 효과가 좋은 약이라 금새 반응이 나타날 거라고 해요. 발열 증세에다, 목이 아프고, 코가 막히는 증상. 맞죠?
네. 맞아요.
나타니엘이 부르는 걸 듣기로는 몸살감기라고 하는 것 같던데. 먹고 하룻밤동안 푹 자고 일어나면 조금 나아질 거라고 해요.
제논은 말을 끝내고는, 자신의 손에 쥐여진 약 봉투를 조심스럽게 지그문트의 손에 건넸다. 바람이 쌀쌀했다. 이제 슬슬 가을의 극치로 다다르고 있는 계절의 바람은 서늘하다기보단 오히려 차가운 것에 가까웠다. 그래서일까, 자신에게 약 봉투를 쥐여주는 제논의 손끝이 어쩐지 차가운 것처럼 느껴져서, 그녀는 조금 한숨을 내쉬었다. 몸 안이 온통 따뜻한 신열로 가득 차서, 한숨을 내뱉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녹아버릴 것처럼 느껴졌다. 제논의 차가운 손은 약을 건네준 뒤 곧바로 자신의 손에게서 빠져 나갔다.
평소의 체온과 달랐어요, 라고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그문트는 무슨 말이냐는 듯, 살짝 고개를 치켜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제 손 끝에 다다르는 지그문트의 체온이, 평소와 달랐다는 뜻이에요. 제논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창틀 너머로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데이터에 저장되어 있거든요. 지그문트의 체온은. 그 말에 그녀의 뺨이 살짝 열로 물들었다. 그와 동시에 조금 쌀쌀한 바람이 불어, 방 안의 커텐이 나부꼈다.
나타니엘에게 이런 말을 들었어요. 감기도 덧날 수 있다는 말을요.
……….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자신의 손을 그의 차가운 손이 붙잡았다. 잠시간, 일순과도 가까운 시간이 지난 후, 제논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밤이 늦었어요. 잘 자요. 그런 다음, 그는 창문을 닫았다. 창문을 닫음과 동시에 밤 바람에 나부끼던 커텐이 차분히 제 자리로 돌아가 창문을 드리웠다.
제논이 건네준 약을 먹고, 그녀는 잠깐동안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아까 창문을 열어뒀던 탓인지 침실 안은 부쩍 쌀쌀한 공기로 가득 메워진 채였다. 머리가 어질거려 잠은 잘 오지 않았다. 누워도 잘 수 있을까… 지그문트는 침대에 앉아 멍하니 그런 생각을 중얼거리다가, 조금 피로해진 두 눈을 말없이 깜빡거렸다. 자신의 이마를 짚던 그의 손끝이 생각났다. 잠들 수 있을까. 심호흡을 하며 천천히 이마를 짚어 보았다. 자신의 손 끝에서 열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손끝과 이마의 체온이 동화된 탓도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부질없는 두 눈을 감았다. 숨결이 뜨거웠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뜨거운지는 영 분명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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