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동자
눈을 깜빡거려 보세요, 라는 의사의 한 마디에 그는 한 쪽 눈을 깜빡거렸다.
전쟁이 끝난 지도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그 때문인지 넘실넘실 몰려드는 부상자들 덕분에 병원은 언제나 북새통이었고, 좁아 터진 진료실은 문조차 닫지 못할 정도로 부산했고 또 정신사나웠다. 해가 져가는 무렵에도 환자는 여전히 많아서, 슬며시 열린 진료실의 문 틈새에선 사람들의 웅성거리는 말소리가 스며들고 있었다. 자신의 앞에 있는 의사가 진료 차트에 무언가를 기록하는 동안에, 그는 잠깐 두 눈을 돌려 문 쪽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진료실 안으로 바깥의 밝은 불빛이 새어나왔다. 그는 천천히 눈알을 굴렸다. 자신의 앞에 앉은 의사가 여전히 슥슥대는 소리로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제논은, 그 의사에게로 시선을 돌릴까 하다가, 이내 시선을 발 부근으로 내리깔았다. 익숙한 진료실, 익숙한 치료. 달라진 건 없었다. 자신의 앞에서 진료 차트를 부지런히 작성중인, 생면부지의 의사 빼고는.
아무래도 낯설다는 듯이 제논이 두 눈에 힘을 주다가, 곧 고개를 푹 숙여 버렸다. 눈에 가득 찬 풍경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부자연스럽다. 이래도 달라지는 건 없겠지. 부정적인 생각이 그의 머리를 가득 메웠다. 눈 둘 곳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다 낯설었다. 그래서 어디에 시선을 둘 생각조차 차마 못한 채 고개를 숙여 버렸다.
에델슈타인에 새로운 의사가 몇 명 들어왔다. 소문에 들리는 바로는, 연합에서 에델슈타인의 의료 업무를 위해 본대륙에서 파견한 의사들이라고 했다. 그들은 똑똑하고 유능한 의사였다. 그들의 의술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에델슈타인의 수많은 부상자들을 상대하기에 충분했다. 에델슈타인의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만족하는 눈치였다. 그들에겐 의사가 필요했다. 다만 제논만이 현실을 끈질기게 부정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에겐 의사가 필요하지 않았다. 전쟁 중에 완전히 날아가버린 한쪽 팔 따위가 없어도 살아갈 수 있었다. 그에게는 치료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는 다른 것이 필요했다. 전쟁이 끝나고 난 뒤, 흔적조차 완전히 짓이겨져버린 그 무언가의 형체가.
그는 일주일에 세 번씩 의사에게 받기로 되어 있던 진료 시간대를 아침으로 옮겼다. 아예 받고 싶지 않다고 차라리 간호사에게 떼를 쓰고 싶었지만, 사람을 살리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그들이 그 요구를 받아들여줄 리가 만무한 상황이었다. 간호사와의 짧은 대화 끝에 그는 자신의 진료 시간을 아침 시간으로 옮겼다. 그렇죠. 저녁 시간대가 조금 시끄럽긴 하죠. 간호사가 미소를 지은 채 건네는 말에, 제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대꾸 대신 남아 있는 오른팔로 병원 문을 조심스레 열었다.
그는 발걸음을 돌려 지하 기지가 있던 곳으로 향했다. 전쟁의 막바지 때, 블랙윙에게 공습을 받았던 지하 기지는 여전히 복구되지 않은 채 아수라장인 채로 남아 있었다. 차라리 아수라장인 편이 더 좋지, 라고 중얼거리며, 제논이 무너져내린 콘크리트 잔해 위에 천천히 몸을 기댔다. 지하 기지에선 언제나 매캐한 냄새가 났다. 레지스탕스들이 시대를 한탄하며 언제나 피워대던 궐련 냄새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어떤 다른 냄새일 테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비밀 기지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차츰 풀려갔다. 저 자리엔 체키가 서 있었지. 그 옆엔 벨, 헨리테, 일렉스… 그랬지. 에이든은 저 쪽에 있었고. 루카는 저 옆. 아, 울리카는 종종 저기 앉아 있곤 했었어. 나는 그 옆에서 코코아를 마시곤 했지. 흐려진 눈 앞에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알을 돌린 시선의 끝에, 반쯤 부서진 칠판이 비춰졌다. 칠판 위에는 여전히 분필로 쓰여진 글씨가 남아 있었다. 그의 눈동자가 차츰 초점을 되찾아갔다.
지하 기지가 습격을 받기 전의 모습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칠판에 무언가를 다급히 적어 내려가던 지그문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떻게든 시민을 구하는 것이 먼저라고, 모두 죽음을 각오하라고 소리치던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 모든 감각들은 잠시동안 허공을 헤매다가, 곧 한 순간의 연기처럼 찢기듯 사그라들었다. 차마 붙잡을 새도 없이 모든 것이 사라졌다. 칠판을 바라보던 그의 눈빛이 강하게 요동했다. 기대 있던 그가 서서히 몸을 일으켜, 칠판 쪽으로 도망치듯 등을 돌렸다. 그녀의 흔적과 대면할 때마다 언제나 알 수 없는 느낌이 머리를 스치웠다.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서도, 아마 그 느낌은, 마지막까지 자신에게 남은 일말의 감정이었을 테다. 그게 아니라면, 그녀가 지난 세월동안 그에게 알려줬던 불완전한 감정의 일종이겠지. 제논이 그런 생각을 되뇌이며 눈을 감았다. 이대로 계속 눈을 감고만 있는 편이 더 나을 것처럼 느껴졌다. 이젠 눈을 떠야만 할 필연적인 이유가 없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없어졌다고 하는 게 맞겠지. 숨을 쉬는 순간순간, 제 몸에 들어서는 입자 하나마저도 그녀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인 것 같아서, 그는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한숨을 뱉어낸 목에서 벌컥 차오르는 열기가 느껴졌다. 그건, 눈을 뜬 이래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열기였다.
밤거리를 걷는 동안 사람들이 몇 명이고 자신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사람들이 자신의 곁을 지나갈 때마다 그는 사람들을 불러 세워 그녀의 행방을 묻곤 했다. 아마 레지스탕스의 하급 단원이었거나 레지스탕스에게 협력한 이들이었을 그들은, 제논이 그런 질문을 할 때마다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곤 했다. 제논은 사람들의 감정이란 걸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런 그조차도, 난처한 사람들의 표정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런 표정을 지을 때마다 제논은 더욱더 오기가 생겨서 더 큰 목소리로 따지듯이 묻곤 했다. 지그문트가 어디 있냐구요, 사람들은 대답하지 않고 자리를 떠나곤 했다. 늘 똑같은 패턴이었다. 똑같이 그녀의 행방을 찾았지만, 그 누구도 답을 알려주진 않았다. 아마 신만이 알고 있을 테다. 힘이 쭉 빠져버린 것 같아, 제논이 밤거리를 비틀거리며 걸어다녔다. 더 이상 이 도시에는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악마같은 블랙윙들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존재도 이 도시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남아있는 건 가로등과, 여전한 어둠과, 그녀가 사랑하던 에델슈타인의 새파란 밤하늘 뿐이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의 눈빛이 저릿하게 전율했다. 차가운 망막에 눈물이 맺혔다. 사람만이 흘릴 수 있다는 그 정수의 한 방울이, 그 차가운 뺨을 타고 흘러 내렸다.
………
제논, 눈을 깜빡거려 보겠어요?
눈동자가 파랗네요.
네. 실험실에서 눈을 떴을 때부터 줄곧 그랬는걸요.
어릴 적과 똑같아요. 조금 더 차가워진 것 빼고… 정말 똑같아요. 당신의 눈동자는.
여전히 예쁜 눈동자에요. 정말로 그리워했던 눈동자기도 하고.
……나는 수십년 간 기다려 왔어요. 다시, 당신의 그 눈동자를 볼 날이 오기를.
…이건 아냐.
어지러이 나열된 과거들이 유리 파편처럼 흩날렸다. 한 쪽 손으로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 손길이 남김없이 초조했다. 침대에 걸터 앉아, 허벅지에는 작게 접힌 종이 한 장을 올려둔 채, 그는 연신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건 아니야, 라고 중얼거리는 마음의 목소리가 점차 작아졌다. 이미 반쯤 풀린 눈으로, 그는 허벅지 위에 올려진 종이를 천천히 훑고 있었다. 언제 썼을는지도 모를, 삐뚤빼뚤한 자신의 글씨가 빼곡히 들어찬 종이의 윗면에는, ‘전원을 끄는 법’ 이라는 무덤덤한 여섯 자의 글씨가 적혀져 있었다. 지그문트도 기뻐하지 않을 거야, 라는 부질없는 걱정이 마음을 메웠다. 그러나 자신의 시선은 그 종이를 결코 떠나지 못했다.
언제 적었더라. 아마 겔리메르의 연구소에서 탈출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자신이 기억하는 대로 무차별적으로 써서 남겼던 걸로 보이는 그 메모는, 무섭도록 덤덤한 글씨체로 제 스스로 사형 선고를 내리는 방법을 차분히 일러주고 있었다. 전원을 끄면, 킬 수 있는 자가 와서 전원을 가동할 때까지는 결코 다시 되살아날 수 없었다. 자신의 전원을 켜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겔리메르 정도였다. 바꿔서 말하면, 이제 더 이상 자신의 전원이 다시 켜지는 일은 없을 것이란 뜻이었다. 그 점은 제논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전원을 끄면 이제 영원히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었다. 제논의 오른손이 연신 머리칼을 매만지다가 곧 서서히 아래로 내려와 종이를 집었다. 종이를 집은 손이 여리게 떨려왔다. 최악의 경우, 더 이상 살아남을 정도의 가치가 없을 때에만 사용하자고 굳게 마음먹었던, 일종의 자살 방법이었다. 지금 나에겐 살아갈 가치가 없는 걸까. 제논은 스스로 묻다가, 곧 한심하다는 듯이 푹 한숨을 내쉬어버렸다. 살아갈 가치는 없었다. 오직 남은 건 괴로움과 미련 뿐이겠지.
자신의 생각보다는 많은 사람들이 살아 있었다. 연합의 모든 사람들, 자신에게 밝은 미소로 인사하던 베리타스의 연구원들, 에델슈타인의 사람들… 모두 목숨에는 이상이 없는 채 여전히 살아 있었다. 죽어버린 건 지그문트 뿐이었다. 전쟁으로 인해 이 세상은 결코 멸망하지 않았다. 무너져내린 건 제논의 세상 뿐이었다.
손에 닿는 족족 스위치가 점차 꺼졌다. 제 손으로 자신의 생명을 하나씩 꺼트리는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정신이 몽롱하니 흐릿해졌다. 거짓말이라면 거짓말이겠지만, 오히려 정신이 몽롱해질수록 점차 눈빛만은 뚜렷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비행선의 갑판 위에서 블랙윙의 폭탄을 정통으로 맞았을 때 느꼈던 느낌과 꽤 흡사한 감각이었다.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지 못한 채 곧 그는 자신을 잠식하는 마수에 제 감각을 완전히 맡겨 버렸다. 점점 손을 쓸 수가 없을 정도로 몸이 굳어갔다. 원래도 차가웠던 철근 투성이의 몸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마지막까지 살아있던 눈빛이 스르르 감기기 시작할 때, 제논이 미묘한 기색으로 입꼬리를 조금씩 올렸다. 어색한 미소 탓일런지 뺨의 근육이 이내 팽팽해졌다. 그 미소마저 몽롱함 속에 잠겨들었다.
똑똑, 하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책상 앞에 놓여진 등받이가 없는 의자에 앉아 있던 그의 고개가, 소리가 나는 쪽으로 천천히 돌아갔다. 곧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많이 늦었나요. 미안해요. 레지스탕스 업무를 보느라.
그렇게 속삭이는 그 목소리가 멎고, 대신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그 빈틈을 메웠다. 환자가 없어 한적한 진료실 안에는, 낡은 커텐 너머로 에델슈타인의 흔치 않은 햇빛이 깃들고 있었다. 구두 소리가 멈추고, 의자를 끄는 소리가 들렸다. 여느 때와 같이 팔락이는 종이 소리도 들렸다. 그와 동시에, 믿지 못할 정도로 익숙하고 아득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제논… 눈을 한 번 깜빡거려 보겠나요?
왼손으로 제 오른손을 매만지던 제논의 눈길이 천천히 지그문트를 향했다. 익숙하단 듯이 고개를 찬찬히 끄덕이며, 제논이 영롱한 푸른 빛의 눈동자를 조금씩 깜빡거렸다. 감겨오는 눈 너머로 지그문트의 모습이 아릿하게 비춰졌다. 손으로 머리를 넘기고, 안경을 쓴 채 부지런히 진료 차트를 적어 내리는 지그문트의 모습은, 간만에 내리쬐는 에델슈타인의 햇빛에 물들어있는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