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논지그] 푸르름
작은 진료실에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만이 가득했다.
초침 소리에 묘하게 리듬을 맞추어, 그녀가 무언가를 쓱쓱 종이에 적어 내려가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함께 들려왔다. 그녀는 안경 너머로 비춰 보이는 하얀 진료 차트에 무언가를 부지런히 기록하다가, 이내 고개를 살짝 들어 자신의 맞은 편에 앉아 있는 그에게로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는 여느 때와 다를 게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고개를 숙인 채, 무덤덤한 표정으로 자신의 손끝만 멍하니 바라보는 그의 공허한 두 눈빛, 그리고 차분한 숨결. 그 모든 게 제 자리를 고스란히 지키고 있는 채, 이렇다 할 동요도 움직임도 없이, 그는 가만히 자신의 맞은 편에 앉아 있었다.
지그문트는 손에 쥐고 있던 만년필을 살짝 책상에 내려 놓았다. 펜촉 끝에서 채 마르지 않은 잉크들이 방울지어 천천히 어디론가 흘러갔다. 약간은 변색된 하얀 종이 위에 쓰여진 그의 질병들은, 자신이 지금까지 예상하고 있던 것보다 조금 더 심했다. 뭐,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연구실에서 막 나왔을 때, 흘긋 스치듯 바라보았던 그의 눈빛은 꽤 흔들리고 있었고, 게다가 약간은 초점을 잃은 듯한 눈치였으니까. 다만 충격을 받은 건, 단지 자신이 그의 어릴 적 친구였기에 그런 것 뿐이리라.
숨을 깊게 내뱉으며 천천히 이마를 감쌌다. 그는 자신에게 마음을 열지 않으려고 했다. 어쩌면 이것도 최종병기로서 그가 학습한 하나의 시스템 수칙일 수도 있겠지. 그러한 그의 행동이 머리로는 어쨌거나 이해가 갔지만, 가슴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공허한 두 눈빛이 이마를 감싼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 눈빛을 마주할 만한 힘마저 다 빠져나가버린 것만 같아, 지그문트는 속으로 또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는지 알 수 없었다.
그의 반응을 물어본다. 죽어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며, 어떤 감정이 드냐며 질문을 던진다. 그는 고개를 젓는다.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아요, 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차분하게 그녀의 귀에 꽂혀 들어온다. 잠시간의 정적이 흐른 뒤, 그녀는 다시 다음 질문으로 넘어간다. 다음 질문에서도, 그의 대답은 늘 한결같이 똑같다. 그렇게 한 시간이 지난다. 두 시간이 지난다. 그의 공허함만을 증명하는 시간들이 의미없이 흘러간다. 늘상 똑같은 그의 대답을 종이에 받아 적으며, 울컥할 것만 같은 감정을 그녀가 그 대신 가까스로 삼켜낸다. 또 다시 두 사람 간에는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가득 찬다.
아침부터 계속된 진료는 낮 쯤에 끝났다. 이제 가봐도 좋아요, 라고 말하는 그녀를, 앉은 채로 한참동안이나 바라보던 그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차근차근 새어나왔다.
―미안해요. 지그문트.
진료 차트를 작성하던 그녀는, 순간 만년필을 집은 채 무언가 끄적이고 있던 손을 멈춰 버렸다. 이내 그녀는 조금 떨리는 듯한 눈빛으로 천천히 그에게 시선을 맞췄다. 뒷편에 놓여진 창문에서 햇빛이 들어오기 때문일까. 어딘가 그늘진 것처럼 느껴지는 그의 무표정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그의 눈동자가 자신의 눈에 들어왔다. 이제는 렌즈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지. 그 눈동자 앞에서 일순 굳어버린 지그문트가, 이내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다시 작성하고 있던 진료 차트 쪽으로 눈을 돌려버렸다. 미안해요, 라는 그 말이 여전히 자신의 귓전을 맴돌았다. 그는, 제논은, 자신에게 무얼 사과하고 싶어하는 걸까. 기억을 잃어버린 것? 그게 아니라면,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 쉽사리 답이 나오지 않았다. 지그문트는 제논이 보지 못할 정도로 작게 아랫입술을 사근사근 깨물었다.
―당신이 사과할 필요는 없는데. 감정을 잃어버린 것도, 기억을 잃어버린 것도, 모든 게 당신의 잘못이 아닌데. 그 말이 입 안에서 자꾸만 찰랑거리다가 겨우 가라앉았다. 그 말을 뱉는 대신 무릎 위에 놓여진 왼손을 쥐며 조금씩 힘을 줬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 드는 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쉽게 가셔지지 않는 묘한 감정이 여전히 자신을 쥐고 흔들고 있었다.
만년필을 쥔 오른손에는 도저히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만년필을 떨어트렸다. 목재 책상에 떨어진 만년필의 끝에서는 울컥거리는 검은 잉크가 새어 나왔다. 지그문트, 펜을 떨어트렸어요. 제논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그녀가 떨어진 만년필을 집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펜을 잡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노릇이라고, 그녀가 불현듯 생각했다.
지그문트는 진료실에서 나와, 지나칠 정도로 푸르게 솟은 가을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들었다. 하늘이 눈아플 정도로 푸르렀다. 푸른 하늘, 자신을 이따금씩 스쳐가는 선선한 바람 속에서, 그녀는 잠시간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시간이 흘렀다. 몇 분쯤이나 지났을까, 그래도 그 자리를 차마 벗어날 수가 없었다. 제 머리 위를 스치는 푸른 하늘은, 마치 어릴 적의 친구가 늘 두르고 있던 스카프 모양으로 찬란하게 푸르렀다. 순간 자신도 모르게, 하늘을 향해 손을 뻗던 그녀가, 자신의 손 끝에 닿는 가을의 햇볕을 느끼고는 어색하게 손을 움츠렸다. 어릴 적, 두 사람이 바라보던 가을 하늘이 떠올랐다. 햇빛에 물들어 금방이라도 아지랑이처럼 흔들릴 것만 같던 유년의 기억들이, 아직 따가운 햇볕을 타고 제 손끝을 화끈 스쳐 지나갔다. 지그문트는 고개를 숙여, 오므려진 자신의 손가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늘이 드리운 자신의 손가락이 보였다. 그늘에 젖어버린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진료실을 나가던 그의 뒷모습이 떠올랐다. 그 날, 노을을 등지고 집으로 걸어가던 어린 날의 뒷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그는 이제 다른 사람이었다. 어쨌거나 타인이었다. 어린 날, 자신과 기억을 나누던 푸르른 소년은 이제 더 이상 그의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 그렇지만, 헛된 기대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완벽히 굳어버린 인조의 눈동자 위에 어릴 적 소년의 눈동자가 자꾸만 흐릿하게 덧대여졌다. 그의 눈동자를 생각하자, 자신의 눈 앞에 보이는 손가락이 뿌옇게 넘실거리며 흐려졌다. 뿌옇게 흐려진 시야와 함께, 그녀가 다시 한 번 고개를 치들었다. 간간히 비행운만이 떠도는 청량한 에델슈타인의 하늘이 보였다. 하늘이 멀었다. 높았다. 닿을 수 없을 정도로 멀게 느껴졌다. 그런 하늘이 문득 그의 뒷모습과 닮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붙잡을 수 없을 정도로 먼 푸르름이었다. 그러나 그는 손끝만이라도 간절하게 닿고 싶은 존재였다.
뺨을 타고 일견 흐르는 눈물이 따가우리만치 선명하게 느껴져서, 그녀가 눈을 깜빡거렸다. 눈을 깜빡거릴수록 푸르름은 더욱 선명해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모습이 눈 앞을 스쳐 지나갔다. 문득 그가 사무치리만치 보고 싶다고,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